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(문단 편집) === 군인의 길을 걷다 ===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220px-Rokossovsky_1916.jpg|width=300]] ▲ 1917년 부사관 시절의 로코솝스키 --[[키이라 나이틀리]]-- [[제1차 세계 대전]]이 발발하자 로코솝스키는 군에 입대, [[부사관]]으로 훈련받은 후 제5[[기병]][[연대(군대)|연대]]에 입대하여 용맹을 발휘, 4개의 게오르기 십자 훈장을 획득했다([[게오르기 주코프]]의 경력와 비슷하다). 1917년에 [[러시아 혁명]]이 발발하자 로코솝스키는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에 가담하였고 폴란드인 출신 지원병들을 모집해 붉은군대에 입대시켰으며, [[러시아 내전]]이 발발하자 제30기병사단 소속 연대를 이끌고 백군과 싸웠다. 나무랄 데 없는 활약을 한 로코솝스키는 [[프룬제 군사대학]]에 입학해 엘리트 장교가 되는 교육을 받았지만 소련군 내에서 암암리에 벌어진 폴란드 출신에 대한 차별 때문에 승진이 더딘 편이었다. 그런데 1919년에 [[소비에트-폴란드 전쟁]]이 터지자 제27기병연대장인 로코솝스키는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앞장서서 참전, 동족인 폴란드인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. 이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그의 충성심이 인정되어 로코솝스키는 군부 내에서 입지를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다. 1929년에는 [[중화민국]] [[봉천군벌]]의 수장인 [[장쉐량]]이 소련의 관할이었던 북만주 중국 동부 철도를 회수한 것([[중동로 사건]])을 계기로 [[봉소전쟁]]이 발발하였는데, 이때 만주 침공군을 지휘한 [[바실리 블류헤르]] 원수의 휘하에서 참전하기도 하였다. 이후 제7, 제15기병사단장이 되고 제5기병군단장으로 승진하는 등 군인으로서의 로코솝스키의 미래는 탄탄대로인 것처럼 보였다. 2차 세계 대전 중 라이벌 격이었던 [[게오르기 주코프]]와의 첫 만남은 1930년대 초반 이루어졌다. 이 당시 로코솝스키는 제7사마라(쿠이비셰프) 기병사단장을 맡고 있었고, 주코프는 그 휘하의 [[여단장]]이었다. 그는 공식적으로 주코프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. >'''"엄격함. 자신의 욕구에 쉽게 만족하지 않고 집요함. 다소 불손하고 충분히 호감이 가지는 않음. 다소 고집스러움. 자부심에 가득 차 있음. 전문적인 면에서 잘 훈련되어 있음. 지휘관으로서 폭넓은 경험을 갖고 있음."''' 로코솝스키는 [[미하일 투하쳅스키]]가 주창한 종심 전투 교리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 붉은 군대 내의 보수적인 지휘관들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. 그런데..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